Page 4 - 40호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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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옛 추억이 있는 세상                                                                                             옛 추억이 있는 세상                                       5


            사        랑에             굶     주린






                          아 들                                                                                    흑백 사진 한장
                                                이




                                                                                                                                                                                      1978년 퇴소  김○○
            ‘아이들과 비를 맞으며’에서 발췌                                                      故 양계석 원장님
                                                                                                                 내 나이 어느새 오십대, 지천명을 넘은지가 사년이나 흘렀다. 내 어린 시절은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고 외로움에 떨었다. 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자주 한다.                                                                           럴수록 더욱더 내 기억은 인천 계명원에서 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다.
            자기 자식 미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965년도로 기억난다.  내 나이 7살.
                                                                                                                 제물포역 앞에서 울고 있던 나를 지나가는 아저씨가 파출소에 데려다 주었다. 경찰 아저씨께서 주신 빵이 얼마나 꿀맛이었던지,  지금도 그 빵 맛
            그러나 말로만 사랑하는 것을 아이들은 쉽게 감지(感知)한다.
                                                                                                                 이 어제 일 같이 생생하다. 경찰관의 인도로 낮선 남자분의 손을 잡고 들어선 곳이 내가 어른이 될 때 까지  자라던 계명원 이었고 지금도 가슴 떨리
            아이들에게 내가 정말로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느낀다. 그런 사랑 주는 부모 이이게, 어느 때는 욕                                      도록 그리움과 추억이 쌓여있던 곳이다. 그때부터 나는 계명원 가족이 되어 선생님의 손길 속에,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며 나의 부모님도 잊은 채
                                                                                                                 기쁘게 살았다. 나는 송림동에 위치한 서림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는 계명원 식구들만 40명도 넘었다. 등교 할 때는 집에서
            먹고 매 맞아도 순종하고 곧바로 품속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이들이다.
                                                                                                                 모두가 함께 출발했다. 동산 중, 고등학교를 지나 순대국밥 집, 여인숙, 책방 등 여러 가게들을 거쳐 학교앞에 도착하면 맛있는 먹거리와 문방구 앞
            아이들에게 자신이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의 알록달록 작은 상점이 나의 발을 멈추게 했다. 어떤 때는 그런 알록달록한 상점 앞에  쭈구리고 앉아서 넋 놓고 구경하기도 했다. 돈이 없으니 알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에게는 내가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항상 밑바닥에 쌓여있다.                                                          사탕. 과자들만 실컷 바라보다가 배가 고파지면 주인아주머니 몰래 달콤한 알사탕을 훔쳐 먹기도 했다. 학교에서 지겹게 공부하는 것 보다 배회하
                                                                                                                 며  세상구경하는 재미에 빠진 나는 점점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것저것 동네상점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하교시간이 되면 집으
            내가 사랑 받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감은 고질병처럼 피해의식을 생산한다.                                                              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의식 때문에 조금만 배고파도 몇 일 굶은 사람처럼 참지 못하고, 조그만 상처에도 울음을 터트리는 행동으로                                        추억의 한 장면이라서 일까? 나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어릴 적,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보고 또 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그 사진을 다시 꺼내
                                                                                                                 어 들여다본다. 꼬깃꼬깃 빛바랜 흑백사진속의 내가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냈다고... 또 한분이 미소 지으신다.  민철이는 대견
            나타난다.
                                                                                                                 하다고 늘 격려해 주시던 원장님모습이 ...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아무리 배불리 잘 먹어도 일 년 내내 가슴이 허허한 것이다.                                                       예전 계명원에서 식사시간이 되면 땡~땡~땡 하고 종을 쳤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먹으려고 우르르 식당으로 달려간다.  줄을 서서 밥을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자기가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받아야 하기에 전 속력으로 달려도 늘 형들한테 밀려 중간 줄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섭게 생긴 큰~형이 내 앞줄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나도 마냥 배가고픈 터라 나도 모르게 형한테 대들고 말았다. 내 인생은 그때부터 험난한 삶의 길이 예견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호랑
            스스로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야 책임감과 자각이 생긴다.                                                                       이 같은 형한테 대들었다는 이유로 계명원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학교생활도 지겨웠던 나는 미련 없이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 당시
            이것은 정신 건강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봄이었다. 제물포역에서 무조건 기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도착한 곳이 지금 내가 고향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는 전라
                                                                                                                 남도 목포였다.. 가출 이후로 내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린나이였고 배움이 짧아서 중국집 배달원, 봉제공장 시다. 공사판 청소 등.. 삶이 너무도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의 이런 허허한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기 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버거워, 나를 힘들게만 하는 어른들을 원망하며 살았다. 어린 아이가 어느새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나의 생활을 점점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이 아이들을 잘 먹이는 일과 함께 이런 굶주린 부모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대신 해주며                                                 어느 한날 술의 취해 골아 떨어 진 나에게 “이 놈아 정신차려“ 호통치는 소리가 들렀다. 내가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양계석 원장님의 모습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조금만 괴롭고 힘들어도 핑계 삼아 먹던 술을 끊었다.
            스스로 다스리도록 교육하는 일인 것이다.
                                                                                                                 비록 나에겐 부모, 형제는 없지만 원장님이 계셨구나.. 그때부터 제 2의 삶을 살게 됐다. 운전기술은 학벌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자격증을
                                                                                                                 따서 운전기술로 앞으로의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고 열심히 노력해서 면허증을 땄다. 지금까지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면 면허증을 받던 날과 지하
                                                                                                                 월세 방에서 아내와 무조건 살림을 차리던 날을 꼽고 싶다. 지금까지 택시 운전을 하며 자녀 둘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계명원을 까마
                                                                                                                 득히 잊고 살았다. 아내가 나에게 넌지시 건넨다.
                                                                                                                 “아이들도 잘 성장하고 예전에 비해 지금은 이만하면 안정적이니 당신이 늘 그리워하던 원장님도 찾아뵙고 어릴 적 살았던 계명원도 둘러봅시다.”
                                                                                                                 나는 아내의 말에 마음이 설레어 잠을 설치고 다음날 동생들, 아니 손자 벌 되는  계명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택시에 가득 싣고 인천 송림동으로
                                                                                                                 향했다. 내 고향, 내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 도착하니 내 마음속에 늘 함께 하시던 양계석 원장님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양성수 원장님의 말을 듣고,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설움, 늦게 찾아 온 죄스러운 마음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계명원의 친구들에게
                                                                                                                  “나는 너희들의 영원한 형이다”라고 생각하고 후원금도 보내고 선물도 사서 보내곤 하였다.
                                                                                                                 ”늘 마음이 텅 비워있을 동생들아! 힘내어 살아가자. 지금은 힘들어도 노력하면 꼭 좋은 날은
                                                                                                                 찾아온단다. “
                                                                                                                 양계석 원장님, 보고 싶습니다. 고마웠습니다.
                      1978년 9월 9일 故양계석 원장님의
                                                                                                                 그 어려운 시절 나를 돌봐주고 일깨워준 복지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마음을 담은 일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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